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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여행 떠나는 성우의 여행생활입니다. 최근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는데, 이 내용은 사실 1212사태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의 내용은 역사가 이미 결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정말 긴박하고 표현을 잘했으며, 평점도 높아 한번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럼 1212사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물소개(실제 / 영화)

영화 '서울의 봄'을 제작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할때 역사속 인물들이 모티브가 됬지만 영화적으로 재해석했기에 인물들이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름이 아애 새롭게 바뀐 이태신(실제 인물 장태완)이란 인물은 실제 사건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인물에 가깝다는 설명까지 합니다.

왼쪽사진 : 전두광(실제인물 전두환) / 중간사진 : 이태신(실제인물 장태완 소장) / 오른쪽사진 :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실제인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왼쪽사진 : 노태건 소장(실제인물 노태우) / 중간사진 : 김준엽 준장(김진기 준장) / 오른쪽사진 : 최한규(실제 인물 : 최규하)
왼쪽사진: 오국상국방부장관(실제인물: 노재현국방부 장관)/ 중간사진: 오진호소령(실제인물 : 김오랑소령)/ 오른쪽사진: 원경대령(실제인물: 조홍대령)

그 외 더 자세한 인물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 하세요.

 

 

박정희 암살과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은 유신독재 권력자이자 대통령을 다섯번이나 지낸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날 밤부터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더불어 전두환은 수사본부장으로서 김재규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당시 보안사령관으로써 검찰과 경찰 등의 중요한 국가 정보를 모두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전두환은 각 부처 차관들을 자신들의 방으로 불러 모아 보고를 받는 일까지 하면서 사실상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소문까지도 돌았습니다. 또한, 전두환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등의 노력등을 했는데,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묘사가 됩니다.

 

한편, 정승화 총장은 이러한 전두환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참고 : 하나회는 어떤 조직인가>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조직인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챙기던 사조직이었는데, 이 조직의 회원들은 주로 영남출신의 육군사관학교 11였으며, 그 중심인물로는 전두환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하나회의 뜻은 태양(여기서의 태양은 박정희를 뜻 함)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12.12 사태(군사반란)

김재규 사건을 조사하던 중, 전두환은 약 9억원(현재가치로 약 300억원)의 돈을 발견합니다. 이 돈을 정승화 총장에게 뇌물로 제공하려 했지만, 정승화 총장은 이를 거부합니다. 정승화총장은  이후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을 동해로 좌천시키는 계획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계획은 국방차관인 김용휴에게 들키게 됩니다.

 

김용휴는 이 정보를 전두환한테 전달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전두환은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하나의 의혹을 제시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해현장에 정승화총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사실과 다르며 정승화 총장은 그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이 의혹을 빌미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로 결심합니다. 전두환의 오른팔인 허삼수 대령은 33헌병대 병사들을 이끌고 정승화 총장의 관저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첫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이 12.12 군사반란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첫 총격전이 있었던 때에 전두환은 중요한 행사를 계획했는데, 그것은 바로 '생일잔치'라는 이름의 만찬(연희동 위장만찬)이었습니다. 이 만찬의 초대장은 전두환을 통해 장태완소장 직속의 수경사 헌병단장 조흥대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만찬에는 여러 주요인사들이 참석해습니다. 그 중에는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이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장태완소장과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을 묶어두기 위함)

 

(전두환의 쿠데타가 정당화가 되려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필수 였는데, 최규하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승인 없이는 절대 안된다고 버틴상황이었음. 첫 총격전 이후 국방장관은 숨어서 지냈는데, 8시간이 지난 후 육군본부에 나타나게 되고 신군부에 잡히게 됨)

반란이후 상황(결과)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다음날 새벽, 노대현 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은 차례로 정승화 총장 체포동의안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특히, 최규하 대통령은 이 동의안에 날짜와 시간까지 명확하게 기록하여 '선체포 후동의'라는 절차 위반 사실을 명확하게 남기게 됩니다. 이 기록은 후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내란죄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활용됩니다.

 

정승화육군총장은 쿠데타 직후 고문을 당하고, 대장에서 이등병까지 17계급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그와 함께 정태완, 정병주, 김진기 셋은 김재규에게 돈을 받고 내란 방조죄에 동참했다는 죄목으로 불명예 재대를 겪게 됩니다. 특히, 정병주 사령관은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군사반란 이후, 1년 뒤에 대통령(제 11대) 자리에 오르고 8년간 두번의 셀프 당선이 되며 나중에는 2인자 노태우에게 자리를 물러주어 신군부 시대는 10년동안 지속되게 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목소리 : 서울의 봄에서 광주 민주화까지

1980년, 쿠데타 이후의 한국은 큰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유신헌법의 폐지와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거세지자,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지하고 민주정부 출범을 약속하게 됩니다. 3월에는 대학생들이 가세하여 전두환 퇴진운동이 확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이 넘치는 시기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물어서질 않고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는 5월 17일, 신군부는 또다시 쿠데타를 자행합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초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여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18일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됩니다. 이 운동은 신군부에 대한 거센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신군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이로인해서 짧았던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